올 겨울에는 집 안에서 춥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어제는 추워서 아침부터 고생을 좀 했습니다. 건물의 보일러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더군요. 일 때문에 첼시 쪽에 나가야 해서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보일러가 고장 났으니 따뜻한 물이 나올리 만무하지요. 나갈 시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떡진 머리를 하고 책상에 앉아서 일을 좀 하다가 오전이 다지날 무렵에야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찬물로 씻는 걸 좀 많이 싫어합니다. 군생활을 강원도 인제에서 했는데 막사 시설이 낙후되어서 뜨거운 물을 하루에 한번만 쓸 수 있었거든요. 짬밥 안될 때는 그것도 쓰질 못해서 일주일씩 씻지 않고 살다가 분대장의 명령에 동기들과 영하 25도의 겨울날 찬물로 샤워를 한 적도 있습니다. 추운 곳에서 군생활 해보신 분들은 다 이해하시겠지만 그런 사연들로 전역 후에는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싫어지더군요.
그런데 어제는 정말 얼음처럼 차가운 물만 나오는 겁니다.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보려고 물에 손을 담갔는데 손이 아려오더군요. 나갈 시간은 다가오는데 세수할 물을 끓이는 야단법적을 떨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그 물을 틀어놓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습니다. 5분 정도 고민했는데 차마 샤워는 못하겠더라구요.ㅎㅎ 그렇게 세수를 하고 나니 손과 얼굴이 찢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별 수 없다 싶어서 숨이 턱턱 막히는데 샴푸도 안풀리는 그 차가운 물로 머리까지 감았습니다. 그렇게 씻고 나서 세면대 위의 거울을 들여다 보니 얼굴이 얼어서 새빨갛더군요.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날 생각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십여 년 전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기숙사 신청을 제때 못해서 친척분 댁에 한달 반 가량 얹혀 살았습니다. 서울시 외곽에서 원예업을 하시는 분 댁이었기에 저도 비닐하우스로 된 집 안에 살면서 차가운 수돗물로 매일 아침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지요. 2~3월이면 아침 저녁으로 많이 추웠을 텐데 그 때는 그것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찬물로 씻으면 잠이 번쩍 깨서 좋았고, 무엇보다 씻고 나서 학교에 갈 생각에, 그리고 수업 끝나면 서울 구경 할 생각에 신이 났거든요. 부산에서 막 올라온 촌놈이 서울이 좀 추워도 마냥 신나고 좋기만 했던 겁니다.
3학기를 다니고 군대를 갔더니 추위의 차원이 다르더군요. 신병 시절엔 코 풀 휴지가 없어서 눈을 한 움큼 쥐어다가 그걸로 흐르는 콧물을 해결 하기도 했고, 막사에 수도관이 터져서 개울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휴가를 가는 날 아침에 수도관이 얼어서 욕조에 있는 얼음을 깨고 그 밑에 있던 물로 세수하고 머리감고 그렇게 휴가출발을 하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만 그때는 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당연하게 제공되는 것인 줄 알았던 많은 것들이 부족할 때에야 비로소 기쁘고 감사하게 느껴지더군요.
세월이 지나서 지금은 서울 외곽의 비닐 하우스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휴전선 부근의 산골 막사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 시절과 크게 다를 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뉴욕 맨하튼이라는 지금껏 살아오던 곳과는 너무도 다른 곳에서 아직도 젊음 하나만 믿고 전전긍긍 하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마음 자세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찬물로 세수하는 것이 왜 그렇게까지 싫었을까요. 왜 즐거운 마음으로 머리를 감지 못했을까요. 불과 십여 년 전도 돌아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감사하지 못하고 바쁘게만 살고 있다면, 대체 저는 무엇을 찾으러 나고 자란 땅을 떠났던 걸까요.
세월 좀 지났다고, 나이 좀 먹었다고 대접을 받고 싶나 봅니다. 대접받을 만큼 이룬 것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어려서 뭔가를 이룬 분들에 비해서 투입한 시간이나 노력도 거의 없는 주제에 말이지요. 아무래도 반성하고 각성하는 뜻에서 매일 아침 찬물로 세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로 씻고 났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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